
안녕하세요 한별입니다.
유홍준 나의 문화 유산기 책 인용, 참고하여 정리해봅니다.
그럼 강원도 양양 낙산사 시작하겠습니다.
낙산사 화재 (2005년)
나무위키

2005년 4월 4일 일어난 큰 산불이 5일 오전 낙산사로 번져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 당시 산불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이전부터 낙산사 주변에서 물을 뿌리며 확산을 막던 소방헬기들도 다른 곳의 불을 끄느라 도저히 낙산사로 올 수 없었고, 그나마 진화를 위해 출동한 소방차마저 불에 탈 정도였다. 낙산사의 승려와 신도들이 소화기로 불을 꺼보려 했지만 고작 소화기 따위로 이 큰 산불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화재로 보물 제479호로 지정되었던 낙산사 동종이 녹아서 소실되면서 결국 같은 해 7월 7일 지정해제되었다. 산불에 어떻게 금속 종이 녹아내리나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지만, 나무가 탈 때 내는 에너지는 생각보다 크다. 산불 같은 대화재의 겉불꽃(제일 뜨거운 부분)은 천수백°C로 녹는점이 1000°C 근처인 구리나 청동은 충분히 녹일 수 있다. 게다가 차라리 종이 넘어져서 땅바닥으로 굴러갔다면 손상은 입어도 녹지 않았을 텐데, 하필이면 종루가 불타서 종을 그대로 덮어버려서 화덕에 들어간 꼴이 되어 녹아버리고 말았다.
출처: 나무위키
양양 낙산사 의상대와 홍련암
국가유산포털

「양양 낙산사 의상대와 홍련암」은 송강 정철(1536~1593)의 <관동별곡>에 소개된 관동팔경 가운데 하나로 동해 일출경으로 매우 유명한 곳이다.
671년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는 “낙산사”와 낙산사 창건 당시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한 해안 암벽 위에 설치하였다는 “의상대”, 의상대사가 홍련 속의 관음보살을 친견하여 설치한 “홍련암” 등 낙산사의 곳곳에 의상대사와 관련한 전설이 전하는 곳이다.
의상대와 홍련암은 바닷가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에 노송(老松)들이 자리하고 있어 동해안의 아름다운 해안 절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으며, 떠오르는 일출 경관으로 유명하여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곳이다.
홍련암: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 중 하나인 낙산사는 해변에 자리잡은 특이한 구조를 갖춘 절이다.
낙산사 옆쪽에 있는 이 불전은 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가 세웠고 광해군 12년(1619)에 고쳐 세운 기록이 남아 있으나 지금 있는 건물은 고종 6년(1869)에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의상대사가 붉은 연꽃 위에 나타난 관음을 직접 보고, 대나무가 솟은 자리에 홍련암을 지었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건물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건물이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어 문을 옆면에 달아 앞면으로 사용하고 있다. 법당 안에는 조그만 관음보살좌상을 모시고 있고 ‘보타굴’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의상대: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낙산사를 지은 의상대사를 기념하기 위해 1925년에 만든 정자이다. 원래 이곳은 의상이 낙산사를 지을 당시 머무르면서 참선하였던 곳으로 옛부터 의상대라 불렸다고 한다.
6각으로 만들어진 아담한 크기의 의상대는 낙산사에서 홍련암의 관음굴로 가는 길 해안 언덕에 있어 좋은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다. 난간을 비스듬하게 세운 것은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출처: 국가유산포털
만해 한용운 선생이 이 아름다운 곳에 정자 하나 없음이 아쉽다며육각정을 세우고 의상대로 이름지었다.
유홍준,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낙산사 홍예문
국가유산포털

조선 세조 13년(1467)에 왕이 낙산사에 행차하여 절 입구에 세운 무지개 모양의 돌문이다. 당시 강원도는 26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세조의 뜻에 따라 각 고을의 수령이 석재를 하나씩 내어 26개의 화강석으로 홍예문을 만들었다고 한다.
홍예문 위에는 1963년 세운 누각이 있는데, 앞면 3칸·옆면 1칸의 문루이다. 이 문루는 주변 지형을 적절히 이용하여 홍예석 주위에 자연석을 쌓고 세워 특이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출처: 국가유산포털
무지개 형상의 입구를 한 전형적인 조선시대 성문이다.이 홍예문은 사실상 낙산사의 일주문 역할을 한다.
유홍준,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김홍도 낙산사도
위키백과

단원 김홍도의 '낙산사도'는 그의 금강산 사생화첩인 '금강사군첩'의 한 폭이다.
출처: 유홍준,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사진: 위키백과
김홍도가 금강산을 스케치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낙산사, 월정사, 대관령 등을 그렸는데 이것이 새 절 복원의 모델로 되었다.유홍준,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낙산사 칠층석탑
국가유산포털

이 석탑은 창건 당시 3층이던 것을 세조 13년(1467)에 이르러 현재의 7층으로 조성한 탑이다. 이때 수정으로 만든 염주(念珠)와 여의주를 탑 속에 봉안하였다 한다.
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음으로써 천여년간 국교로 자리잡고 있었던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와 함께 불교와 관련된 조형 미술의 분야도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나마 조선 전기에는 불교미술 분야에서 조성 양식이나 수법이 고려적인 작품이 다소 조성되었다. 낙산사7층석탑도 고려시대의 여운이 남아 있는 석탑 중 하나이다.
탑의 받침이 되는 기단부(基壇部)는 정사각형의 바닥돌 위로 밑돌을 놓았는데 윗면에 24잎의 연꽃무늬를 새겼다. 탑신부(塔身部)는 지붕돌과 몸돌을 1층으로 하여 7층을 이루고 있다. 각 층의 몸돌 아래로는 몸돌보다 넓고 두꺼운 괴임이 1단씩 있어 특징적이다. 지붕돌은 경사면이 평탄하며 네 귀퉁이의 들림이 잘 어우러져 전체적인 모양이 경쾌하다.
탑의 머리장식부에는 찰주를 중심으로 원나라의 라마탑(喇嘛塔)을 닮은 여러 장식들이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어 또 다른 특징이 되고 있다.
고려시대의 양식을 이어 받고 있으나 전체의 조형이 더욱 간략화 되었다. 강릉 신복사지삼층석탑·월정사팔각구층석탑 등의 탑신부와 비교해 볼 수 있다.
출처: 국가유산포털
양양 낙산사 건칠관음보살좌상
국가유산포털

낙산사 원통보전에 모셔져 있는 건칠불상으로, 근처의 영혈사에서 모셔왔다고도 전해진다.
금속으로 만든 팔각 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채 앉아 있는데, 적당한 크기로 허리를 곧추 세우고 고개만을 앞으로 약간 숙여 마치 굽어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머리에는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높은 보관을 썼으며, 네모꼴에 가까우면서도 각지지 않은 둥글고 탄력적인 얼굴에는 귀·눈·입·코 등이 단정하게 묘사되어 있다. 목에는 세 개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뚜렷하고, 가슴 부분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었다. 오른손은 가슴에 올리고 왼손은 배에 두었으며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모양을 하고 있는데, 가냘픈 듯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양 어깨를 덮은 옷은 옷주름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는데, 내의 깃이 가슴 밑을 수평으로 가로지르고 있다. 온몸에는 화려한 구슬장식이 드리워져 있다.
이 관음보살상은 표현수법으로 보아 고려 후반의 전통양식을 바탕으로 한 조선초기의 작품임을 짐작케 해준다. 전체적으로 각 부분의 비례가 좋고 특히 얼굴표정이 빼어날 뿐만 아니라, 머리에 쓰고 있는 보관은 고대 이래의 형식에 원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서 보관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출처: 국가유산포털
보물 제1362호로 지정된 아름다운 보살상으로 화재가 일어날 때낙산사 스님들이 황급히 피신시켜 상처를 입지 않았다.
유홍준,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낙산사 담장
국가유산포털

낙산사 법당인 원통보전의 둘레를 사각으로 에워싸고 있는 담장이다.
조선 세조(재위 1455∼1468)가 낙산사를 고쳐 지을 때, 처음 이 담장을 지었는데 대부분 터만 남아 있어 최근에 연결·보수하였다.
안쪽의 담벽을 기와로 쌓고, 바깥쪽은 막돌로 쌓은 이 담벽은 높이 3.7m·길이 220m이다. 암키와와 흙을 차례로 다져 쌓으면서 위·아래로 줄을 맞추고, 일정한 간격으로 둥근 화강석을 배치하여 단조로운 벽면을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법당을 향하고 있는 담장 안쪽에는 밑부분에 2층의 길게 다듬은 돌기단을 깔고, 그 위에 다시 한층의 긴 받침돌을 놓았다. 담장 위에는 기와로 지붕을 이어 담벽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돌기와와 흙으로 높고 정연한 담장을 쌓고 넓은 벽면을 아름답게 장식한 이 담장은, 법당을 둘러싸 신성한 지역을 구분하면서 공간 조형물로서의 효과도 함께 나타내고 있다.
출처: 국가유산포털
원통보전이 불길에 휩싸여 있을 때 소방차가 이곳에 사정없이 물을 쏘아대려고 했으나스님들이 차라리 건물은 포기하고 담장과 석탑은 살리자고 하여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 경황도 없던 때엗 절집의 명물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스님들의 슬기에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일어난다.
유홍준,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낙산사 동종
국가유산포털

조선 예종 1년(1469)에 그의 아버지인 세조를 위해 낙산사에 보시(布施)한 높이 158㎝, 입지름 98㎝의 종이다.
종 꼭대기에는 사실적이고 기품 있어 보이는 용 2마리가 서로 등지고 있어 종의 고리역할을 하고 있다. 어깨 부분에는 연꽃잎으로 띠를 둘렀다. 몸통에는 가운데 굵은 3줄을 그어 상·하로 나누고, 위로 보살상 4구를 새겼다. 보살상 사이사이에는 가로로 범자를 4자씩 새기고, 보살상 머리 위로는 16자씩을 새겨 넣었다.
몸통 아래로는 만든 시기와 만들 때 참여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종의 밑 부분에는 너비 9.5㎝의 가로줄이 있어, 그 안에 당시에 유행하던 물결무늬를 새겨 넣었다.
큰 종으로는 조각수법이 뚜렷하고 모양이 아름다우며 보존상태가 좋아, 한국 종을 대표하는 걸작품이었다.
그러나 2005년 4월 5일 낙산사에 발생한 산불로 낙산사 동종이 소실, 용해되어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2005년 7월 7일 지정 해제되었다.
출처: 국가유산포털
"조신의 꿈"
삼국유사 제3권 탑상(塔像)편에 실린 대표적인 꿈 이야기로, 조신몽(調信夢), 조신지몽(調信之夢), 조신설화(調信說話)라고도 한다. 우리 고전문헌에서 일장춘몽 속의 허무한 인생을 그린 원조 격 작품이니, 중국의 한단지몽, 남가일몽에 못지 않게 우리 조상님들 또한 꿈 이야기에 일가견이 있음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조신이라는 사람이 스님으로 살다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는데, 운 좋게 그 여자도 조신에게 호감이 있어서 둘은 사실상 야반도주를 해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밑천 없이 대충 가정부터 만들었으니 둘 다 가난에 허덕이며 수십 년간 살다 끝내 첫 아이까지 잃고, 자식들은 구걸로 먹고 살다가 개한테 물리는 지경에 처한다. 조신 부부는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서로가 만남이 바로 고통의 시작이었다고 생각하고 이혼하기로 한다. 근데 여기까지 전부 다 꿈이었고, 조신은 깨달음을 얻어 속세에 관심을 잃은 후 다른 절(정토사)을 세우고 선행을 베풀며 살았다는 것.
나무위키
일연스님은 이 전설을 논평해 이렇게 말했다.
"이 전기를 읽고 나서 책을 덮고 지나간 일을 생각해보니,
어찌 조신스님의 꿈만이 그렇겠느냐.
지금 모두가 속세의 즐거운 것만 알아 기뻐하기도 하고
서두르기도 하지만 이것은 다만 깨닫지 못한 때문이니라."
유홍준,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이로써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은 마무리 되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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