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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문화] 강진 해남 2탄

by 한 별_ 2025.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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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해남편

 

 

 

안녕하세요 한별입니다.

요새 일이 바빠서 책 읽을 시간이 부족해 지네요

이러다 연초 목표를 채울 수 있을련가 모르겠습니다 ^^

 

그럼 강진 해남 2탄 시작하겠습니다.

 

 

 

 


김영랑
김영랑 / 출처: 위키피디아

 

김영랑

대한민국 시인, 독립운동가, 전라남도 강진군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윤식이다.

 

(중략)

 

1930년 정지용과 함께 박용철이 주재하던 <시문학> 동인으로 참여했으며, 1930년대 「독(毒)을 차고」,「가야금」, 「달마지」,「춘향」등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해 저항의식을 표출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시를 많이 발표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지조있는 시인으로서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기도 했다.

 

대표적 작품으로는 <돌담에 속삭이는 햇밭>, <모란이 피기까지는>, <내 마음을 아실 이>, <꿈 밭에 봄 마음> 등이 있다. 주로 언어의 조탁을 통해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발굴하고 세련된 시형과 율격으로 섬세하고 투명한 감성의 세계를 고운 어조로 표현했다.

 

초중반기까지는 향토적이고 토속적인 운율이 살아있는 서정적이고 세련된 시를 여럿 발표했지만 일제의 압박이 심해지고 폭압적인 체제하에 놓이면서 후기 영랑의 시는 1940년대까지 저항적이고 날선 느낌으로 변한다. 회유와 협박이 거세지면서 1940년 절필을 선언한 김영랑은 해방이 오기까지 일본어로 된 단 한줄의 글조차 적지 않은 저항시인이기도 하다. 초기의 서정시가 워낙 유명해서인지 비해 후기의 저항적인 면모는 그렇게까지 유명하지 않지만 2008년 금관문화훈장, 2018년에야 건국포장을 받으며 뒤늦게 인정을 받았다.

 

의외로 김영랑은 발표한 시에 제목을 한 번도 붙인 적이 없다. 즉 위의 제목들은 엄밀하게 말하면 모두 가제. 직접 시집을 보면 제목 자리에 번호만 붙어 있는 게 보인다. 보통은 첫 줄의 구절이 제목으로 뽑혀 쓰이는 편이다. 물론 마지막 줄이 쓰인 <꿈 밭에 봄 마음> 같은 예외도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5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시인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강진 정약용 유적 / 출처: 국가유산포털
강진 정약용 유적 / 출처: 국가유산포털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이 유배되어 11년간 머물면서 많은 책을 저술했던 곳이다.

 

정약용은 여유당(與猶堂) 등의 여러 호를 가지고 있으며, 천주교 이름으로는 요한(Johan)이라 하였다.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으며, 유형원과 함께 수원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수원 화성을 쌓기도 했다. 정조가 죽자 신하들의 모함을 받아 투옥되어 유배되었고, 그 후 18년 간의 유배생활 동안 그는 많은 저서를 남겼다. 정약용의 사상은 한국사상의 원형과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곳에서 11년 동안 머물면서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흠흠신서』를 비롯한 500여 권에 달하는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리고 이를 총정리한 『여유당전서』는 ‘철학’, ‘법제’, ‘종교’, ‘악경’, ‘의술’, ‘천문’,‘측량’, ‘건축’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장래에 도움이 될 학문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학술적 연구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옛 초당은 무너져서 1958년 강진의 다산유적보존회가 주선하여 건물이 있던 자리에 지금의 초당을 다시 지은 것이다. 작고 소박한 남향집으로 ‘다산초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초당 뒤 언덕 암석에는 다산이 직접 깎은 ‘정석(丁石)’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초당 왼쪽으로 자그마한 연못이 있다. 앞 뜰에는 차를 달였다는 ‘청석’이 있고, 한 켠에는 '약천(藥泉)' 이라는 약수터가 있어 당시 다산의 유배생활을 짐작하게 한다.

 

※(정다산유적 → 강진 정약용 유적)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출처: 국가유산포털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 / 출처: 국가유산포털

 

 

 

강진 백련사는 고려말 원묘국사 요세(1163∼1245)의 결사처로서 조선시대에도 많은 승려들이 수행했던 사찰이며, 주불전인 대웅보전은 1760년 화재 이후 중창 불사를 통해 1762년에 중수 건물이다.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의 문화유산적 가치는 다음과 같다.

 

첫째, 18세기 불전 건축의 장식화 경향을 대표하는 사례이다. 백련사 대웅보전의 공포는 외3출목 내4출목 형식이다. 제공의 외부는 초제공에서부터 3제공까지 연화 무늬가 결합된 앙서형, 4익공은 연봉이 달린 수서형, 5운공은 봉두이고, 내부는 아래에서부터 차례로 연봉·연밥·연밥·연꽃을 조각했고 그 위로 봉두를 올렸다. 이러한 살미의 구성은 호남을 중심으로 형식화되어 점차 영남까지 확산되는데, 백련사 대웅보전의 건축연대는 그 중간에 있다. 또한, 불상 위에 닫집을 설치하지 않고 우물천장을 이중으로 설치한 점, 실내를 채운 여러 마리의 용과 봉황 장식, 정면 기둥에 끼워진 청룡과 황룡 모습의 안초공, 살미를 길게 빼서 내주의 보아지로 사용하는 기법 등은 당시 건축양식의 시대적, 지역적 전개를 비교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로 평가된다.

 

둘째, 사찰 건축 관련 기록이 풍부하여 학술적 가치가 높다. 백련사 대웅보전 건축과 관련된 기록은 「만덕산백련사대법당중수기」가 대표적이다. 중수기에는 복구 사업의 정확한 일정을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대시주질, 연화질, 야장, 목수질 등 직임과 인명을 정리해두었다. 이를 통해 당시 사찰 건축의 추진과정을 복원할 수 있으며, 담당자들 간의 인맥이나 영향 관계도 추적이 가능하다. 특히, 도편수, 부편수, 승묵편수 등 불전 건축 목수들의 계보와 교류를 확인할 수 있는 사료이다. 나아가 「만덕산백련사중창기」, 「만덕산백련사비」 등과 함께 치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 『만덕사지』가 전하고 있어서, 불교사의 전체적인 맥락 아래 사찰 또는 불전의 건축생산사를 고찰해볼 수 있는 중요한 연구 대상이 된다.

 

셋째, 고려와 조선 불교사의 중요한 유적이다. 백련사는 고려시대에 원묘법사 요세의 백련결사가 개설되고 조선시대에 취여삼우의 법회가 열렸던 장소이고, 효령대군의 지원에 힘입어 중창했던 역사가 있다. 또한 승려들은 사대부에게 의탁하여 중창기와 사적기를 작성했고, 특히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백련사의 승려들과 협업하여 『만덕사지』를 편찬했다. 백련사 대웅보전의 현판 글씨는 조선 후기의 명필 원교 이광사의 작업이며, 법당 실내에는 신라시대 명필 김생의 글씨가 집자되어 있다. 이처럼 백련사의 역사는 권력과 민중, 불교와 유교의 상호교류를 확인할 수 있으며, 대웅보전은 그 한 시기를 예증하는 건물이다.

 

이외 백련사에서 함께 볼것 : 철조아미타여래좌상, 사적비, 동백나무 숲

 

출처: 국가유산포털

 

 

 

 

 

 

 

고산 윤선도가 살았던 집으로 윤선도의 4대 조부인 효정(1476∼1543)이 연동에 터를 정하면서 지은 15세기 중엽의 건물이다. 집터 뒤로는 덕음산을 두고, 앞에는 벼루봉과 그 오른쪽에 필봉이 자리잡고 있는 명당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사랑마당인데, 앞면에 사랑채가 있고 서남쪽 담모퉁이에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다. 사랑채는 효종이 윤선도에게 내려준 경기도 수원에 있던 집을 현종 9년(1668)에 이곳에 옮긴 것이다. 사랑채 뒤 동쪽 대문을 들어서면 안채가 ‘ㄷ’자형으로 자리잡고 있다. 사당은 안채 뒤 동쪽 담장 안에 한 채가 있고 담장 밖에 고산사당과 어초은사당 등이 있다.

 

입구에는 당시에 심은 은행나무가 녹우당을 상징하고 뒷산에는 500여 년 된 비자나무숲(천연기념물)이 우거져 있다. 이곳에는 윤두서자화상(국보), 『산중신곡집』(보물), 『어부사시사집』 등의 지정유산과 3천여 건의 많은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녹우당은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형으로 구성되고 행랑채가 갖추어져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형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해남윤씨녹우단 → 해남윤씨 녹우당 일원)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출처: 국가유산포털

 

 

고산 윤선도
고산 윤선도 / 출처: 위키피디아

 

고산 윤선도

화가 공재 윤두서의 증조부이며, 다산 정약용의 외5대조부이다. 1차 예송 논쟁 당시 송시열의 체이부정 주장과 서인이 당론으로 소현세자와 민희빈 강씨, 김홍욱 복권운동을 벌이는 점을 근거로 송시열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서인의 맹공을 받고 삼수(三水)에 유배되어 오랜 세월 유배생활을 하였다. 조선 효종과 현종의 세자 시절 세자시강원의 한 사람이었던 덕에 사형은 모면하고 유배를 받았다. 유배지에서 울적한 심사를 달사부래며 지은 어부사시사 등은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다.

 

출처: 위키피디아

 

 

공재 윤두서 자화상
공재 윤두서 자화상 / 출처: 국가유산포털
 

공재 윤두서

 

윤두서가 직접 그린 자신의 자화상으로 크기는 가로 20.5㎝, 세로 38.5㎝이다. 윤두서(1668∼1715)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이자 정약용의 외증조로 조선 후기 문인이며 화가이다.

 

종이에 옅게 채색하여 그린 이 그림에서 윤두서는 윗부분을 생략한 탕건을 쓰고 눈은 마치 자신과 대결하듯 앞면을 보고 있으며 두툼한 입술에 수염은 터럭 한올한올까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화폭의 윗부분에 얼굴이 배치되었는데 아래 길게 늘어져 있는 수염이 얼굴을 위로 떠받치는 듯하다.

 

우리나라의 자화상은 허목의『미수기언』이나 김시습의『매월당집』을 보면 고려시대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18세기에 들어서는 이강좌, 강세황의 작품들이 전해온다. 이런 자화상 가운데 윤두서의 자화상은 표현형식이나 기법에서 특이한 양식을 보이는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외 함께 볼것 : 가전화첩, 동국여지지도

출처: 국가유산포털

 

 

대흥사 천불전
대흥사 천불전 / 출처: 국가유산포털

 

 

대흥사는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두륜산 줄기에 자리하고 있다. 두륜산(대둔산)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한 넓은 산간분지에 계류를 끼고 자리한 대흥사는 여러 불전들을 지형적 조건에 맞추어 독립된 군을 이루어 배치함으로써 정연한 가람배치에서 느낄 수 없는 자유로움과 조화를 느낄 수 있다.

 

대흥사의 입지는 『대둔사지(大芚寺誌)』(1823)의 기록에 나타나듯이 절을 가로지르는 금당천을 사이에 두고 북쪽과 남쪽으로 나누어 당우들을 배치하였는데, 현재 북원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응진전, 산신각, 백설당, 청운당이 자리잡고 있으며, 남원에는 천불전을 중심으로 용화당, 가허루, 봉향각, 동국선원, 종무소 등이 또 하나의 군을 이루어 배치되어 있다. 또한 남원의 오른편에는 표충사와 부속건물, 성보박물관이 있고 그 뒤편에 대광명전 영역이 별원을 형성하고 있다.

 

천불전은 대흥사 남원(南院)의 중심 불전이다. 큰 대문채와 같이 평범한 단층 5칸 맞배집으로 구조된 가허루의 중앙 문간을 거쳐 천불전 안마당에 들어서면 정면의 높은 장대석 축단 위에 서향하여 자리한 천불전이 마주보이고 왼쪽에는 봉향각이, 오른쪽에는 옛 강원이던 용화당이 마당을 둘러싸고 있어 독립된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대웅전에 비하여 마당은 크지 않지만 공간에 맞게 각 건물의 규모와 형식을 갖추었고,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집인 천불전은 높은 장대석 축단 위에 자리하고 있어 남원(南院) 공간의 중심건물로서 격식과 품위가 느껴진다.

 

천불전은 1813년에 중건된 건물로 대흥사 남원의 중심건물로서 격식을 갖추고 있으며, 「일본표해록(日本漂海錄)」(楓溪賢正, 1821) 등을 통해 건물의 중건과 천불 조성 및 봉안의 역사를 명확히 알 수 있다.

 

건축적으로는 평면 비례, 공포 배치, 상부가구 등에서 천불을 봉안하기 위한 합리적인 계획수법을 볼 수 있으며, 공포의 구성과 세부적 조각수법, 빗천장과 우물천장의 장식과 구성, 창호 등은 화려하지만 지나치지 않고 구조 또한 견실하다. 이러한 공포, 빗천장, 우물천장 등의 구성 및 세부적 수법은 인근의 국가지정유산(보물)인 미황사 대웅전(1754), 불갑사 대웅전(1764), 불회사 대웅전(1808) 등과 유사한 수법을 보여주고 있어 비교되어 가치가 높다.

 

이처럼 대흥사 천불전은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천불전 건물을 대표할 수 있는 건물로서 역사적, 학술적으로 국가지정유산(보물)의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외 함께 볼것 : 서산대사 유물

출처: 국가유산포털

 

 

 

 

 

 

달마산 기슭에 자리잡은 미황사는 우리 나라 육지 가장 남쪽에 있는 절이다. 미황사 사적비에 따르면 통일신라 경덕왕 8년(749)에 처음 지었다고 한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조선 선조 31년(1598)에 다시 지었고, 영조 30년(1754)에 수리하였다고 한다.

 

석가모니 불상을 모시고 있는 대웅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주춧돌은 앞면 4개와 옆면 2개를 특이하게 연꽃무늬에 자라, 게 따위를 조각한 돌을 사용하였으며 나머지는 자연석을 썼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형식인데 가운데에 불교어인 ‘범(梵)’를 선명하게 새겨 놓았다.

 

미황사 뒷산에는 ‘토말(土末)’이라고 쓰여진 비석이 있는데 우리 나라 육지의 끝을 표시한 것이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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