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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문화] 경주 1탄

by 한 별_ 2025.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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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한별입니다.

유홍준 나의 문화 유산기 책 인용, 참고하여 정리해봅니다.

그럼 경주 시작하겠습니다.

 

 

 

 


첨성대

국가유산포털

첨성대
첨성대 / 국가유산포털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로,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基壇部)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圓筒部)를 올리고 맨 위에 정(井)자형의 정상부를 얹은 모습으로 높이는 약9m이다.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옛날 사람들은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그래서 첨성대의 기단은 정사각형이고 몸체는 원으로 되었다.모두 27단으로 되었는데, 맨 위에 마감한 정자석(井字石)과 합치면 28, 기본 별자리 28수를 상징한다. 여기에 기단석을 합치면 29. 한달의 길이를 상징한다. 몸체 남쪽 중앙에는 네모난 창이 있는데, 그 위로 12단, 아래로 12단이니 이는 1년 12달과 24절기를 상징하며 여기에 사용된 돌의 숫자는 어디까지 세느냐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362개 즉 1년의 날수가 된다.

— 박성래, 한국사특강. 서울대 출판부
출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중

 

 

 


진평왕릉과 장항리 폐사지

국가유산포털

진평왕릉
진평왕릉 / 국가유산포털

신라 26대 진평왕(재위 579∼632)의 무덤이다.

 

진평왕은 독자적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새로운 중앙 행정부서를 설치하였다. 또한 중국의 수·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통해 백제와 고구려의 침공을 효율적으로 막았고, 경주 명활성을 보수하여 수도 방위에 힘썼다.

 

높이 7.9m, 지름 36.4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이다. 무덤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해 둘레돌을 둘렀으나, 현재 몇 개만 남아있다. 규모로 보아 왕릉급 무덤임이 분명하며 평야 가운데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신라진평왕릉 → 경주 진평왕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장항리 사지
장항리 사지 / 국가유산포털

 

 

 

토함산 동남쪽 계곡의 비교적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이다.

 

절터가 있는 계곡은 대종천의 상류로 감은사터 앞을 지나 동해로 흘러간다. 절을 지은 연대나 절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데, 장항리라는 마을 이름을 따서 장항리사지라 불러오고 있다.

 

절터에는 서탑인 5층석탑과 파괴된 동탑의 석재, 그리고 석조불대좌가 남아 있다. 금당으로 보이는 건물터에 있는 석조불대좌는 2단으로 되어 있는데, 아랫단은 팔각형으로 조각이 새겨져 있고 윗단은 연꽃을 조각한 원형대좌이다. 이 대좌 위에 모셔졌던 것으로 보이는 석조불상은 여러 조각으로 파괴된 것을 복원하였으며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서탑은 일제시대에 도굴범이 탑 속에 들어 있는 보물을 훔치기 위해 폭파시켜 파괴한 것을 수습하여 다시 세웠다. 동탑은 계곡에 흩어져 있던 것들을 절터에 모아두고 있다.

 

장항리사지는 계곡 사이의 좁은 공간을 이용하여 쌍탑을 세우고 그 뒤쪽 중앙에 금당을 배치한 점이 주목할 만하다. 쌍탑 1금당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을 보이나, 아직 강당과 회랑의 자리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출처: 국가유산포털

 

 

 

 


황룡사 구층목탑

국가유산포털

황룡사지
황룡사지 / 국가유산포털

 

 

황룡사 가람 배치 때 중심 불탑(佛塔)으로 건립되었으나 현재는 옛터만이 남아 있다.

 

황룡사구층목탑의 창건과 중수 등에 관해서는 『삼국유사』탑상편 제4 「황룡사구층탑」조에, 자장(慈藏)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태화(太和) 못가를 지날 때 신인(神人)과 나타나 나눈 대화에서 “우리 나라 신라는 북으로 말갈에 연하고 남으로 왜인에 접하여 있으며 고구려·백제의 침범이 잦아 걱정이다.”고 하자, 신인이 “황룡사 호법룡(護法龍)은 곧 나의 장자로서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돌아가 그 절에 구층탑을 세우면 근심이 없고 태평할 것이다”라고 한 데서 보인다.

 

이 내용은 구층탑을 세우게 된 사상적 배경이 불력(佛力)으로 나라를 지킨다는 데 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자장은 당나라 태종(太宗)이 준 경전과 불상·가사 등을 가지고 귀국하여 구층탑 건립의 필요성을 선덕여왕에게 건의하였다.

 

탑을 9층으로 한 것은 이웃나라의 시달림을 막기 위함으로 제1층은 일본, 제2층은 중화, 제3층은 오월(吳越), 제4층은 탁라(托羅), 제5층은 응유(鷹遊), 제6층은 말갈(靺鞨), 제7층은 단국(丹國), 제8층은 여적(女狄), 제9층은 예맥(濊貊)을 제압하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황룡사구층목탑은 선덕여왕 12년(643)에 착수하여 645년에 완성되었고, 그 높이는 상륜부 42척(약 15m), 탑신부 183척(약 65m), 전체 225척(약 80m)의 대탑이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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